어린 시절 궁금했다. 왜 산타할아버지만 있고 산타할머니는 없을까(물론 산타가 ‘있다’는 말부터 깊이 따지면 철학의 주제가 된다). 사실 산타할머니는 ‘있었다’. 1849년부터 미국 사람들은 산타클로스의 아내 “미시즈 클로스”를 상상했다. 딸린 식구인 요정과 순록을 보살피고 남편 뒷바라지에 열심인 현모양처의 모습이었지만 말이다.
20세기 후반을 지나며 달라졌다. 21세기에는 산타할아버지 없이도 당당하다. “새로운 시대에 산타는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까?” 2018년에 디자인회사 그래픽스프링스가 영국과 미국 사람에게 물었다. 열명 중 한명꼴로 “여성 산타”를 원했고, 두명꼴로 “젠더 뉴트럴”을 바랐다(산타가 다이어트를 하고 스키니진을 입기를 바라는 사람도 꽤 있었다). 올해 애플은 다양한 성별의 산타 이모티콘을 출시했다. “성탄절을 둘러싼 전쟁”이라며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움직임을 환영하는 사람도 많다. 이맘때 즐겨 먹는 사람 모양 과자의 이름 ‘진저브레드 맨’을 ‘진저브레드 피플’로 바꿔 부르는 사람이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와 맥락이 같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나는 <100만번 산 고양이>로 유명한 작가 사노 요코의 그림책 <산타클로스는 할머니>를 소개하고 싶다. 산타클로스가 되겠다는 남성 지원자들이 “하느님의 집” 앞에 길게 늘어섰는데 할머니 한명이 끼어 있었다. 남자들이 비웃자 할머니는 말한다. “꼭 남자만 산타클로스가 되란 법은 없잖아요.” 시작 부분을 보면 할머니의 통쾌한 모험담 같은데(영화 <지 아이 제인>도 연상된다) 꼭 그렇지는 않다. 눈물이 쏟아지는 마지막 반전이 기다린다. 얇은 책이니 부담 없이 한번 읽어보시면 좋겠다. 감동과 여운은 얇지 않지만.
루돌프가 세상에 등장한 해는 1939년. 미국 몽고메리워드 백화점에서 비용을 줄이기 위해 자체 제작한 그림책의 주인공이었다. 역사도 짧고 탄생 배경도 의외다. 그렇다고 ‘백화점의 상술’이라 외면하기에는 파란만장한 사연이 있다.
그림책 일을 맡은 사원 로버트 메이. 당시 개인사가 좋지 않았다. 암을 앓던 아내가 이해 여름에 세상을 떠났다. 슬픔을 잊기 위해 메이는 루돌프 이야기에 열중했다고 한다. 그림책은 크게 성공했다. 1939년과 1946년에 육백만부를 냈으니.(그림책에 나온 루돌프는 순록보다 사슴처럼 보인다. 당시 표지를 보고 빚어보았다.) 그런데 루돌프 이야기의 저작권은 백화점에 있었다. 정작 메이는 숨진 아내의 병원 빚을 갚으랴 어린 딸을 키우랴 돈 문제로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말이다. 여기까지는 크리스마스에 어울리지 않을 잔혹한 이야기 같다.
그래도 결말은 훈훈하다. 백화점은 앞으로 나올 루돌프 시리즈의 저작권을 메이에게 흔쾌히 넘겨줬다. 마침 메이의 매부 조니 마크스는 솜씨 있는 작곡가였다. “루돌프 사슴코는 매우 반짝이는 코….” 종교색 없는 흥겨운 노래 덕분에 루돌프는 성탄절을 대표하는 스타가 됐다. 메이는 같은 백화점 사원과 재혼하여 다섯 아이를 더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나.
시작은 순조로웠다. 안무를 무용계의 전설 마리우스 페티파가 맡았다. 차이콥스키도 의욕을 보였다. 발레에 합창을 넣고(눈꽃송이 왈츠) 새 악기 첼레스타를 도입했다(사탕요정 춤). 그런데 일이 꼬였다. 페티파는 중간에 앓아누웠고, 1892년 12월18일의 첫 공연에 대한 평론가 반응은 싸늘했다. 차이콥스키는 ‘호두까기 인형’을 망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1954년에 반전이 일어난다. 미국 뉴욕 공연이 대박이 났다. ‘미-소 냉전’과 무관하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 새 안무를 맡은 게오르게 발란친이 고향 소련으로 돌아가는 대신 미국행을 택한 사람이라서다. 발레는 미국을 근거로 곧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종교색이 없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크리스마스의 상징이면서도 아기 예수가 나오지 않는다.” <비비시>(BBC)의 2015년 분석. 정치적이지 않아 보이던 ‘호두까기 인형’이 어쩌면 정치적 텍스트일지도 모른다.
최근 뜨거운 이슈이기도 하다. 먼저 인종주의 논란. ‘중국 사람 춤’의 국적 불명 안무가 문제다. 흑인이 여주인공을 처음 맡은 것도 2019년이다. “사실 많이 늦었죠.” 11살의 프리마돈나 샬럿 네브레스의 <뉴욕 타임스> 인터뷰다. 성차별 문제도 있다. 페티파의 안무에서 여성은 수동적이라는 지적이 요 몇년 사이 나온다. 지난해 데이턴 발레단 공연에서 남자가 하던 호두까기 인형 역할을 처음으로 여성이 맡기도 했다.
차이콥스키의 성정체성도 다시 논쟁이다. 2013년에 러시아 정부가 “차이콥스키는 게이가 아니었다”고 발표했기 때문. “그가 동성애자였다는 자료가 차고 넘치는데도”(<가디언>의 당시 기사) 이 뜬금없는 주장이 나온 일이, 푸틴 정부의 동성애자 탄압과 맥락을 같이한다며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크리스마스다. 아기 예수를 찾아온 동방박사가 몇명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성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익숙한 서방의 전승에 따르면 동방박사는 세 사람이고 이름은 멜키오르, 가스파르, 발타사르다. 그런데 아르타반이라는 네번째 동방박사 이야기를 미국의 목사이자 외교관이던 헨리 밴다이크가 소설로 썼다.
아르타반은 하늘의 별을 보고 아기 예수를 만나러 길을 떠났다. 세개의 값비싼 보석을 예물로 챙겼다. 여기까지는 다른 세 동방박사와 같다.
그런데 아르타반은 여행을 계속하지 못한다. 광야에 쓰러진 어린아이를 보았기 때문이다. 아이는 다섯군데 상처에서 피를 흘렸다(다섯군데 상처는 기독교 전통에서 예수 수난의 상징이다). 아르타반은 아이를 구해 근처 마을에 데려다주고 치료비로 보석 하나를 건넸다.
다음에 일어난 일을, 독자들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다시 길을 떠난 아르타반은 가난 때문에 큰 빚을 지고 노예로 팔려가는 가족과 마주쳤다. 가족의 빚을 갚기 위해 두번째 보석을 내주었다. 이어 전쟁으로 고통받는 마을에 다다랐다. 잡혀가는 사람들 목숨을 구하기 위해 세번째 보석을 마저 주었다.
아르타반은 이후로도 고통받는 사람과 마주쳤고, 그때마다 옷가지를, 소지품을, 자기가 타던 말을 건네주었다. 결국 아르타반은 모든 걸 잃고 구걸하며 떠돌다가, 어느 항구에 다다른다. 그곳에서 노예로 팔려갈 사람 대신 자청해 노예살이를 한다.
수십년 종살이 끝에 아르타반은 해방된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곳에 갔다가 청년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것을 본다. 사형수가 자기가 찾던 사람임을 깨닫고, 십자가 아래 쓰러져 예수와 함께 숨을 거둔다.
다음 사건이 뻔하게 짐작되는 이 이야기가 마음에 남는 까닭은 무얼까. 2023년 우리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리라. 가난 때문에 많은 가족이 흩어지고, 침략당한 우크라이나와 가자에서 전쟁은 여전하다. 세명의 동방박사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즐기면서도, 거지꼴을 한 네번째 동방박사 아르타반을 떠올리면 마음 한쪽이 불편하다.
① 남으로, 남으로: 분단 이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내려왔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다시 남쪽으로 빠져나왔다. 기독교 신자에다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터라 인민군한테 잡히면 살아남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한강에 다다를 무렵 이승만이 다리를 끊고 달아나는 바람에 구멍 난 조각배를 타고 겨우 강을 건넜다고.
② 다시 남으로: 군의 통역을 맡아 함경도까지 올라갔지만 연말에 다시 철수를 해야 했다. 전투물자와 미군을 싣고 남쪽으로 떠날 배는 열한척. 그런데 흥남부두로 몰려든 피난민이 십만명이었다. 1950년 12월14일에 시작된 흥남철수. 미군은 고민 끝에 전투물자를 버리고 민간인을 태웠다. 이때 미군을 설득한 사람이 현봉학.
③ 다시 북으로: 훗날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 의학 교수 신분으로 중국과 북한을 방문하며 다시 북을 찾았다. 연변에 방치된 시인 윤동주의 무덤을 발견한 이도 그다. 서울에 그의 동상이 섰다. “십만명의 피난민과 피난 후에 태어난 나와 같은 2세에게는 생명의 은인 같은 분.” 제막식에서 연설한 사람은 문재인, 대통령이 되기 전 지난해 12월19일이었다.
원래 병원을 개업한 의사였다. 의대 시절의 교수 조지프 벨은 신통한 재주가 있었다. 처음 만나는 환자의 직업을 알아맞히곤 한 것. “환자를 잘 관찰하면 알 수 있다.” 깜짝 놀란 학생들에게 밝힌 비결. 훗날 코넌 도일이 명탐정 셜록 홈스를 창조할 때 본뜬 인물이 바로 벨이다.(왓슨이 개업의인 점은 도일과 닮았다.)
추리소설 작가로 성공. 실제로 날카로운 추리력을 발휘해 억울한 사람의 누명을 벗겨준 일도 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추리소설을 접고 모험소설을 쓰려고 했다. 셜록 홈스가 한번 죽었다가 되살아난 것은 이 때문. 그러나 공룡을 만나러 떠나는 작품 <잃어버린 세계>를 빼면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말년에는 심령술에 심취해 세상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기사 작위를 받고 아서 코넌 도일 경이 되었다. 소설을 잘 썼기 때문이 아니라, 보어전쟁 때 영국 정부를 편드는 책을 쓴 까닭에 칭호를 받았다고 본인은 생각했다. 이때 갖가지 전쟁범죄로 영국 정부가 욕을 먹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얄궂다.(훗날 나치한테까지 조롱받았을 정도.) 그래서 도일이 더욱 고마웠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릴 때는 홈스처럼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될 턱이 있나. 관찰력도 없고 추리력도 없었다. 잘난 체하는 기술 하나만 홈스 뺨치게 발달했다. 왓슨 박사나 레스트레이드 경감 대하듯 우쭐대고 살았다. 그러지 말걸.
어른이 되어 다시 읽은 홈스. 그렇게 논리적이지는 않더라. 요즘 영화나 드라마처럼 무서운 연쇄살인범과 싸우지도 않는다. 그를 본뜬 아류 캐릭터처럼 지나치게 반사회적이지도 않다. 그래도 매력은 여전하다. 출퇴근도 안 하고 직장상사 눈치도 안 보며 잘난 체를 참지도 않지만 일감도 계속 들어오고 성질 부려도 참아주는 친구도 있다니, 역시 부럽지 않은가?
베파나는 착한 마녀 할머니다. 여느 때처럼 빗자루를 들고 집을 치우던 참에, 낯선 사람들이 나타나 “신의 아이가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곳이 어딘지 알려달라”고 했다. 베파나도 몰랐다. 그래도 낯선 방문객을 친절히 대접해줬다.
찾아온 사람들의 정체는 동방박사였다. 함께 ‘신의 아이’를 만나러 가자고 했다. “해야 할 집안일이 많다”며 베파나는 거절했고, 동방박사는 떠났다. 이튿날 베파나의 마음이 바뀌었다.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일지 궁금해졌다. 뒤늦게 쫓아갔으나 결국 동방박사도 아이도 만나지 못했다.
이탈리아 전설에 따르면, 베파나는 오늘날까지도 그 아이를 찾고 있다. 1월5일 밤이면 빗자루를 타고 세상을 돌아다니며, 어린아이가 있는 집마다 들러 “이 아이가 ‘신의 아이’인가” 확인한다는 것이다.
다른 이야기도 있다. 베파나는 아이를 잃은 엄마인데, 너무 큰 슬픔에 미치고 말았다. ‘신의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선물을 들고 아이를 찾아 나선 것이라고 한다. 결국 베파나는 세상 모든 아이의 엄마가 되어, 해마다 아이들을 챙긴다는 이야기다.
베파나는 벽에 걸린 양말 안에 선물을 두고 간다. 착한 아이에게는 사탕을 주고, 못된 아이에게는 석탄 한 덩이를 준다. 그런데 어떤 아이도 일년 내내 착하게 살지는 않기 때문에 요즘은 많은 아이가 과자와 함께 ‘석탄’을 받는다나. 그래도 걱정 마시길. 진짜 석탄이 아니라, 캐러멜로 거뭇하게 색을 입힌 달콤한 ‘석탄 사탕’을 두고 간다니 말이다.
산타클로스와 세가지 점이 다르다. 12월25일 성탄절 전야가 아니라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를 찾아간 1월6일 전날 밤에 나타난다는 점, 순록이 끄는 썰매 대신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닌다는 점, 텁수룩한 할아버지가 아니라 여성이라는 점. 어른을 위한 ‘선물’도 있다. 들고 다니는 빗자루로 바닥을 쓸어 주고 간단다. 그러면 한 해 동안 묵은 집안의 우환이 사라진다나. 이탈리아 사람들은 추운 겨울날 선물을 들고 하늘을 날아온 베파나가 몸을 녹이고 가라고, 1월5일 잠들기 전에 와인 한잔을 식탁 위에 따라 둔다고 한다.
카를 마르크스도 의외로 평범한 면이 많다. 딸 셋을 공주처럼 키우겠다며 없는 살림에 아등바등하던 ‘딸바보’였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과격한 말로 유명하지만, 런던 망명 시절 12월이면 딸들과집을 꾸미고 성탄절을 맞았단다.
예전에도 이 이야기를 쓴 적 있다. ‘마르크스를 흠잡다니 괘씸’이라는 근엄 좌파의 비판을 각오했더랬다. (아니, 살짝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마르크스를 입에 올리다니 빨갱이’라는 극우의 유치한 비난이 많았다. 다른 동네는 사회당도 선거로 집권하는 21세기인데 우리 사회는 시시한 냉전을 좋아하는 분들이 제법 보인다. 어쨌거나,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절 특집으로 꾸며봤다. 산타클로스처럼 수염이 근사한 사람? 르네상스 시대의 멋쟁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어떨까. 재능도 재능인데다 용모도 아름다워 주위에 사람이 늘 많았단다. <최후의 만찬> 벽화가 워낙 유명하지만 성탄을 소재로 한 드로잉 <동방박사의 경배>도 훌륭하다. 그런데 미완성이다. 밑그림만 남았다. 다빈치는 이렇게 그리다 만 그림이 많다. 재능에 비해 작품 수가 적다. 아니, 재능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에 완성된 작품이 적을지도 모른다. 창조적 아이디어가 지나치게 넘쳐 작업을 방해한 건 아닐까. 얄궂다. 우리한테 더 많은 작품을 선물로 남겨줬다면 좋을 텐데, 아쉬울 뿐이다.
정부가 금지한 불온사상을 몰래 모여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들을 제대로 학습시킬 지도자를 보내달라고 외국에 요구하기도 했다. 불온사상의 이름은 ‘서학’, 요즘 말로 천주교였다. 종교색을 지우고 민족주의도 빼고 이 시기를 바라보면 어떨까.
중국인 주문모의 밀입국은 1794년 섣달, 양력으로 12월24일이었다. 밀입국을 도운 사람은 윤유일과 지황, 숨겨준 사람은 최인길이다. 1795년에 체포조가 들이닥쳤을 때 대신 잡혀가 고문받고 죽은 것도 그들이다. 체포조가 간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준 사람이 있었다. 정부의 비밀회의에 참석한 정약용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한때 서학을 연구하다 전향을 선언하고 정부 쪽 사람이 된 그다.
그다음은 밀사와 밀정의 싸움이었다. “교회는 중국에 밀사를 파견하고 임금은 밀정을 심었다.”(정민) 밀사의 이름은 황심이었다. 신분은 양반인데 마부로 변장하고 1797년 중국에 갔다. 밀정은 조화진이다. 정조가 직접 골라 서학 조직에 심었다. 그런데 정조가 죽은 후 자기가 정부 쪽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길이 없었다. 영화 <무간도>는 흥미로웠지만 현실은 잔인했다. 조화진은 훗날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1801년에 대규모 검거가 시작됐다. 많은 사람이 고문받고 목숨을 잃자 주문모는 자수하고 처형되었다. 청나라 국적의 신부를 조선 정부가 죽인 일은 외교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수배 중이던 황사영은 조선 정부의 인권 탄압과 주문모의 죽음을 알리는 밀서를 중국에 보내려고 했다. 유명한 ‘황사영 백서’다. “그의 절박한 절규는 요즘의 유엔에의 탄원서 제출과 같은 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박노자) 그런데 조선 정부는 상황을 역이용한다. 외세의 개입을 요청하는 뒷부분만 편집해, ‘가백서’를 만들어 사상 탄압의 명분으로 사용한다.
1795년부터 1801년까지 주문모가 숨어 지내던 곳은 강완숙의 집이었다. “양반가의 서녀”였던 그는 “마이너리티로 태어나 마이너리티로서의 삶에 대해” 곱새겼을 터이다.(이규원) 사상범을 돕고 스스로 사상범이 된 것도 그래서였으리라. 강완숙의 용기를 생각하며 그 얼굴을 상상해 빚어보았다.
2005년에 교황이 된 베네딕토 16세는 운이 없었다. 전임자 요한 바오로 2세가 너무 인기가 좋았던 것이다. 무슨 일을 해도 비교를 당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말도 있지만, 미디어에 비친 베네딕토 16세는 낡은 전통에 사로잡힌 권위적인 이미지였다. 8년 만에 사퇴한 그의 후임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된 날이 2013년 3월13일이다.
지금까지는 개인적 매력을 내세워 잘해 나간다는 평가. 관용적인 언행과 소탈한 태도가 인기다. “노숙자의 죽음은 기사가 되지 않는데 주가는 2포인트만 떨어져도 기사가 된다”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호소했다. 한국에서도 좋은 이미지. 2014년 8월에 한국을 방문, 비싼 중형차 대신 작은 차 쏘울을 탔다. 세월호 유족을 만나 위로한 일도 화제였다.
앞날이 밝지만은 않다. 개혁할 과제가 많아서다. 성직자의 성추문도 그 가운데 하나. “신학 박사를 받은 수녀가 남성 사제를 위해 허드렛일을 한다”는 뿌리 깊은 남성우월주의와 무관하지 않다는 시선도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시대가 가기 전에 가톨릭은 오랜 폐단을 청산할 수 있을까?
기독교 신학대학의 학장이 종교재판을 받고 교단과 학교에서 쫓겨난 사건이 있다. 다른 종교와 대화를 시도했다는 이유로 말이다. 중세 유럽이 아니라 1992년에 한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변선환은 과격한 주장을 펴는 사람도 아니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상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이순신은 교회에 안 다녔는데 천국에 갔을까”라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질문이 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 사상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우리 상식과 맞지 않나? 같은 기독교라도 가톨릭은 1960년대 이후 저 입장이다.
그런데 변선환은 불교에 관한 논문을 썼다가 감리교에서 출교당했다. 현대사 굽이굽이마다 사건 사고(!)로 이름난 김홍도 목사가 여기도 등장한다. “1978년에도 그는 변 학장의 출교를 시도한 바 있었다.
당시 감신대 전교생이 발의를 막아 무마되었다. 1992년 5월7일 금란교회에서 종교재판이 이뤄졌고 교인 3천명이 동원되어 감신대 학생들의 진입을 막았다. 나는 현장에서 광기를 느꼈다. 변 선생의 변론은 금란교회 교인들이 부르짖는 소리에 막혀 잘 들리지 않았다.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제자 이보철 목사의 회고다. 재판이 끝난 후 제자 ㅇ목사가 찾아왔다.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씀하신 건 잘못입니다. 저라면 ‘교회 안에도 구원이 있다’고 얘기했을 겁니다.” 변선환은 대답했다. “그거 말 된다. 냉면 먹으러 가자.”
“어려서부터 책이 좋았다”던 변선환은 마지막 순간까지 공부를 했다. 원불교에 대한 글을 쓰다가 책더미 위에 엎드려 숨을 거둔 날이 1995년 8월7일 또는 8일이다.